시전문계간지 신생최신호
시전문계간지 신생
생태 시인의 프리즘 12
이경수 생명이 꿈틀대는 사랑의 노래
―문정희의 시
문정희는 일관되게 사랑을 노래해 온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꿈틀대는 생명력의 원천은 사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문정희의 시도 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와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종종 드러내 왔다. …(중략)… 망가질 대로 망가진 도시이자 인류 문명이지만 살아 있는 그날까지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이 ‘즐거운 지옥’을 조금은 살 만한 지옥으로 바꿔 가는 것밖에 다른 선택지는 우리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기후 위기 시대에 시가 낼 수 있는 목소리는 결국 살아 있다고 절규하는 생명의 목소리일 것이다. 문정희 시가 평생을 바쳐온 사랑의 시도 미친 경쟁과 속도에서 생명을 건져 올리는 노래일 것이다. “물결에다 시를” 쓰는 “가문도 족보도 없이 떠도는/ 시인”(「시인의 장례식」,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을 그가 아직 꿈꾼다면 말이다.
생명이 꿈틀대는 사랑의 노래
―문정희의 시
이경수
1.
지난 12월 3일 밤 난데없는 비상계엄령 선포 현장을 티브이를 통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밤, 장갑차 앞을 온몸으로 막아서고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의 발 빠른 대처로 비상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처음 걷는 길을 날마다 실시간으로 걷고 있다. 허술해 보였던 비상계엄령이 오랫동안 계획된 일이었다는 놀라운 사실과 말도 안 되는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묵인한 정치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분노하게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킨 이들은 이 땅의 시민들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자부심과 위안을 안겨 주었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의결과 체포와 구속과 기소, 헌재의 탄핵 재판까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는 응원봉을 들고 대통령의 탄핵과 민주주의 수호를 외친 2030 여성을 필두로 한 새로운 시위 문화와 주말마다, 심지어 퇴근 후 날마다 집회 현장으로 나아가 다양한 시민 사회와 연대한 새로운 젊은 세대가 있었다. 이 난데없고 부끄럽고 화가 나는 사태의 유일한 희망을 우리는 여기서 보았다.
그러나 희망 못지않게 절망도 함께 볼 수밖에 없었다. 전 국민이 비상계엄령 선포의 순간을 지켜보았음에도 이 명백한 사태 앞에 내란을 부정하거나 말도 안 되는 부정선거 루머로 사태를 호도하거나 내란 주동세력을 비호하고 수십 년 전으로 퇴행할 뻔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려는 시도 또한 계속되고 있다. 비논리와 비상식이 횡행하는 극우의 난동은 가히 해방기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다시 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논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만큼 끔찍한 사회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도 마주 앉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기본 전제가 있을 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지켜지는 것인데, 그 기본 원칙마저 무시하려는 행태가 폭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은 우리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부지법을 향한 폭력 사태는 그런 점에서 12월 3일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훼손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일련의 탄핵 정국과 내란에 대한 재판이 계속되고 있고 12월 3일 이후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우리들의 시간도 현재진행형이지만, 극단적으로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들고 상식을 무너뜨린 이 사태에 대해 문학의 눈으로도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말했듯이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우리를 돕고 살렸다는 점은 감동적이지만, 우리 사회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얼마간 있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 없다. 극우 유튜브를 가동시키는 힘은 오로지 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란 주동범을 비호하는 정치인들을 움직이는 힘도 사실은 자신의 이익과 돈의 논리에 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돈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사회가 되도록 방치한 우리 모두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돈에 미친 사회의 징후가 포착된 지는 제법 오래되었지만 속도와 경쟁에 미친 우리 사회는 결국 자본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
생명 대신 자본의 논리를 앞세우는 사회적 분위기가 저런 괴물들을 만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광기만으로 이 사태를 축소해 이해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위험한 일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응원봉 시위와 키세스 시위라는 새로운 광장의 문화를 만들어낸 아름다운 청춘들이 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공감을 느끼기보다 위기의식을 느끼며 혐오와 폭력을 앞세우는 세력 또한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공을 위해서는 타인을 짓밟아도 된다고 말하는 경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결국 이런 폭력적인 사태와 믿고 싶은 것만 믿어버리는 무지의 집단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비단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데 있다. 미국 역시 개발과 돈과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고, 세계 곳곳이 극우화되어 가는 징조가 현실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개발의 논리로 우리 자신뿐 아니라 지구를 닦달해 망가뜨린 인류 문명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려고 하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가 계속 있었지만 개발의 욕망을 멈추게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보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개발과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세력이 비호하는 이 정부에 들어서서는 오히려 다시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풀어주면서 개발의 욕망을 부추기는 정책을 펴 왔고 지구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후 위기의 경고를 무시해 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만 보고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살아온 것이다.
생태주의의 관점에서 문정희의 시에 대해 논해야 하는 이 글을 최근의 정국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현실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한 명의 괴물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경고했듯이, 우리들 각자가 자기 성찰 없이 시키는 대로 부속품처럼 일하다 보면 평범한 개인도 거대악에 봉사할 수 있는 법이다. 한 사람의 괴물에게 이 사태의 책임을 돌려 버리면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그 괴물을 만드는 데 일조한 모든 이들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괴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연루된 모든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책임지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 작동하는 폭주기관차의 욕망을 멈추게 하고 취약한 존재들이 서로를 돌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 사회의 방향을 돌리려는 실질적인 노력도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상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였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우리 사회는 좀 더 나빠진 방향으로 이동해 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행히 지난 시대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은 세대가 있어서 더 나쁜 퇴행을 막아낸 것이다. 이 글은 문정희의 시를 경유해 오늘날의 생태시의 상상력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와 생명과 사랑의 추구로 나아가야 함을 논하고자 한다.
2.
문정희는 일관되게 사랑을 노래해 온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꿈틀대는 생명력의 원천은 사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문정희의 시도 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와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종종 드러내 왔다.
그때, 뉴욕 7번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백인 남자가 읽고 있는 뉴욕타임스를 곁눈으로 읽다가
날아든 강펀치에 나는 쓰러졌네
사우스코리아 헝그리 복서, 김득구 사망
인간은 고깃덩이가 아니다, 복싱은 스포츠가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소리 질렀지만 나는 보았네
네 손에도 내 손에도 끼워져 있는 피 묻은 권투 글러브
링에 올라가 싸우게 해 줘!
적어도 누가 때리는지는 알 수 있잖아
14세에 무작정 상경, 껌팔이구두닦이빵공장을 거쳐 올라선
사각의 링, 패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어
아예 관을 짜 가지고 떠났던 스물세 살,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챔피언 맨시니의 주먹에 쓰러졌네
아니야, 그를 쓰러뜨린 건 맨시니의 주먹이 아니었어
너였다구, 나였다니까
링에서 글러브를 낀 채 맞아 죽은 선수가
600명이 넘는다고 활자는 말했지
하지만 이 스릴 넘치는 열광적인 게임을 중지할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었지
사우스코리아 헝그리 복서의 시신 위에는
대머리 독재자의 훈장이 수여되고
피 묻은 글러브가 날아다니는 사각의 링은
아직도 인간의 세상 어디에든 있지
물론 오늘 여기에도 있지
이것은 권투 이야기가 아니야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사각(四角)의 링을 보라구
힘이 없는 것은 죽어야 하는 사각(死角)을 보라구
권투는 적어도 누가 무엇이 때리는지는
알 수나 있잖아
그리고 25년 후, 2008년 사우스코리아 청년
최요삼은 권투 글러브를 낀 채
사각, 사각, 사각의 링에서 또 뇌사했네
그리고 2010년 7월 21일 사우스코리아 청년
스물세 살의 프로 복서 배기석은 경기 후 또 뇌사했네
―「사각의 링」 전문(『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1982년 11월 13일 동양 챔피언이던 한국의 복싱 선수 김득구가 WBA 라이트급 챔피언인 레이 맨시니(Ray Mancini)와 타이틀 방어전을 갖게 되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시저스 팰리스에서 경기가 열렸는데 당시 김득구는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미국까지 성냥갑으로 만든 모형관을 짜 가지고 가서 경기에 임했다고 알려져 있다. 호각세였던 경기가 뒤로 갈수록 기울면서 14라운드에 김득구는 결국 KO 패를 당하게 된다. 안면을 강타한 마지막 펀치로 인해 의식을 잃고 쓰러진 김득구는 경기가 끝난 후에 병원에 실려가 뇌 수술을 받았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고 결국 18일 영면에 들게 된다.
인용한 시는 바로 그 김득구의 생애 마지막 경기와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어릴 적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득구의 마지막 경기가 나도 기억나는데, 시의 화자는 당시 미국 뉴욕에 있었던 모양이다. “뉴욕 7번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백인 남자가 읽고 있는 뉴욕타임스를 곁눈으로 읽다가” “사우스코리아 헝그리 복서, 김득구 사망”이라는 기사 타이틀을 보고 만 것이다. 당시 뉴욕타임스 기사에서는 “인간은 고깃덩이가 아니다, 복싱은 스포츠가 아니다”, “소리 질렀지만” 시의 화자는 “네 손에도 내 손에도 끼워져 있는 피 묻은 권투 글러브”를 보고 만다. “14세에 무작정 상경”해 “껌팔이구두닦이빵공장을 거쳐 올라선/ 사각의 링”에서 그는 “패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아예 관을 짜 가지고 떠”나는 패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세 살”이었고 “그를 쓰러뜨린 건 맨시니의 주먹”만은 아니었다. 김득구를 비롯해 “링에서 글러브를 낀 채 맞아 죽은 선수가/ 60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도 “이 스릴 넘치는 열광적인 게임을 중지할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세상이 그를 일찍 지게 만든 것이겠다.
“피 묻은 글러브가 날아다니는 사각의 링은/ 아직도 인간의 세상 어디에나 있”다. 여기서 화자의 시선은 “권투 이야기”를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사각의 링 위에서는 적어도 누가 나에게 주먹질을 하는지 알 수라도 있지만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사각(四角)의 링”은 “힘이 없는 것은 죽어야 하는 사각(死角)”에 가깝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이를 짓밟고 죽이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독한 세상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 링 위의 죽음도 그 후로도 오래 계속되었다고 이 시는 말한다. 이후의 죽음은 더 빨리 잊혔을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각의 링은 우리가 살아가는 잔혹한 세상에 대한 비유이다.
시류에 편승하듯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가 가고 있지만 나의 속도를 갈 수 없다
멈춰 설 수도 돌아설 수도 없이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려야 한다
이 길을 굳이 야만의 길이라 비난하지는 않겠다
그 대신 운전대에 힘을 주고 나만의 속도를 시도해 본다
하지만 사이와 사이에 끼어
그저 바퀴를 굴릴 수밖에 없다
길이지만 맹목이다
나는 제법 센 날개와 독침을 가졌지만
심지어 꿀을 모으는 일인일기 따위를 떠올려 보지만
무슨 소용인가 쫓기며 쫓는 살기(殺氣)와
속도의 인질일 뿐
가령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혈맥처럼 잘 돌고 있는 이 행렬이
핵보다 쉬이 사람을 쭈그러뜨릴 것도 알 것이다
그사이 개미만 해진 개미 허리에다
자꾸 안전벨트를 조인다
행여 뒤처질까 봐 꼬리에 꼬리를 꽉 물어 본다
―「고속도로」 전문(『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앞의 시와 같은 시집에 실린 이 시에서 문정희는 “내가 가고 있지만 나의 속도를 갈 수 없”는 고속도로에서의 운전에 비유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추구하는 비정상의 속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한다. “시류에 편승하듯 고속도로로 들어선” 이상 “멈춰 설 수도 돌아설 수도 없이/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려야 한다”. 짐짓 “운전대에 힘을 주고 나만의 속도를 시도해” 보지만 “사이와 사이에 끼어/ 그저 바퀴를 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시의 화자가 날카롭게 지적하듯이 “길이지만 맹목이다”.
“쫓기며 쫓는 살기(殺氣)와/ 속도의 인질일 뿐”인 이 상황은 비단 고속도로 위 운전자에게만 해당하는 현실은 아니다. 남들보다 앞서 나가고자 하는 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쫓기는 자이면서 동시에 쫓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살기(殺氣)와/ 속도의 인질”에 불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행여 뒤처질까 봐 꼬리에 꼬리를 꽉 물어” 보는 고속도로 위의 운전자 화자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다가 죽어서도”, “존엄”이라고는 “못 갖는”(「폭염」,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민음사, 2022) 부속품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문정희의 시는 꿰뚫어 본다.
3.
코로나-19와 팬데믹을 겪으며 낸 문정희의 시집에는 자연스럽게 감염병의 시대와 기후 위기에 대한 통찰이 드러난다. “농약과 살충제가 야합하여 기른 야채와/ 플라스틱을 먹고 자란 생선이/ 오늘 저녁 메뉴”인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도 방독면을 써야 하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팬데믹의 시절을 우리는 통과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시집을 읽다 잠들고 싶”(「방독면」,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다는 시인의 낭만적인 꿈은 그야말로 꿈에 머물 뿐인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 집에서 제일 많이 생산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쓰레기”(「나 버리기」,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임을 문정희의 시는 직시한다.
나 살아 있다! 이 말보다 아름다운 말 있으랴
쓰나미 덮치어 초토화된 도시에서
울부짖는 입술들
화면으로 보기조차 죄스러워
온몸 떨고 있을 때
불현듯 내지르는 창밖 매미 소리
전쟁 후 핵폭탄 맞아 시커먼 죽음 속에서
제일 먼저 울었다는 매미 소리
나 살아 있다!
지축을 흔들며 제방을 무너뜨리는
지진도 방사선도 결코 생명을 이길 수는 없다!
목청껏 생명을 증거했던 매미 소리
일찍이 북구시인이 노래했다는
그 매미 소리 내 귀청을 뚫는다
쓰나미에 떠밀리는 이웃들
절망도 슬픔도 작게 만들어
절제되고 겸허하게 구호소 앞에 줄 선 사람들의
긴 행렬을 보며
나 살아 있다!
울컥 몸을 떠는 한여름이다
―「매미와 쓰나미」 전문(『그 끝을 몰라도 돼』, 아침달, 2025)
이 시에는 두 가지 장면이 겹쳐 등장한다. 제목에 등장하는 매미와 쓰나미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생명의 외침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쓰나미 덮치어 초토화된 도시에서/ 울부짖는 입술들”을 티브이 화면으로 바라보며 “온몸 떨고 있”는 화자와 바로 그때 “불현듯 내지르는 창밖 매미 소리”가 겹쳐지며 “나 살아 있다!”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문정희 시의 화자는 “나 살아 있다! 이 말보다 아름다운 말”은 없다고 단언한다. 한여름 장마가 지나면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시의 화자는 “목청껏 생명을 증거”하는 “나 살아 있다!”라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으로 듣는다.
“전쟁 후 핵폭탄 맞아 시커먼 죽음 속에서/ 제일 먼저 울었다는 매미 소리”에서 “지축을 흔들며 제방을 무너뜨리는/ 지진도” 핵폭탄의 투여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방사선도 결코 생명을 이길 수는 없”음을 읽어낸 것이겠다. 매미와 쓰나미를 나란히 놓은 화자의 시선에는 “쓰나미에 떠밀리는 이웃들”도 “나 살아 있다!”라는 매미의 외침처럼 질긴 생명의 힘으로 살아남기를 바라는 시인의 바람이 담겨 있다. 시의 화자가 매미의 절규에 “울컥 몸을 떠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벌새 가지 마! 벌써 가지 마!
초록 눈시울 가득한 나무에서
수천만 번 더 날개를 떨어줘
나무 위에서 네가 우는 동안
나무 아래서 내가 악보를 받아 적는 동안
하루에 10만 8천 6백 39번이나 뛴다는
내 심장은 울음 별 하나를 키우고 말았어
순간순간 반짝이는 기적을
숨 쉬는 별
어제는 너를 그리다 길을 잃었고
오늘은 너를 찾다 길에 쓰러졌어
말하자면 살아 있다는 거야
숲에 사는 얼룩말과 공작새가
서로 악기를 뺏으려고 밀고 당기는 동안
우린 그냥 사랑을 숨 쉬는 잎사귀
깃털에 달린 끈들, 무거운 신발들
미완성이어서 더 절박하고
주소가 없어 더 애절한
벌새 가지 마! 벌써 가지 마!
우린 그냥 순간 순간 절정이어야 해
―「벌새 가지 마」 전문(『그 끝은 몰라도 돼』, 아침달, 2025)
“벌새 가지 마! 벌써 가지 마!”라는 언어 유희(pun)가 1연과 마지막 연에서 시를 열고 닫는 기능을 하는 시이다. 벌새는 지구 역사상 가장 작은 새이자 가장 작은 공룡으로 흔히 불리기도 하는데 긴 부리와 특유의 삐비빅거리는 가는 울음소리와 고속으로 날면서 내는 마치 벌이 웅웅대는 것 같은 날갯짓 소리가 인상적인 새이다. 그런 속성 때문인지 시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새이기도 하다.
인용 시는 뛰어난 비행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작은 몸에 비해 이동 거리가 넓은 벌새의 특징을 이해할 때 좀 더 잘 이해되는 시이다. “벌새 가지 마! 벌써 가지 마!”라는 화자의 간곡한 외침은 아름다운 모습과 소리와 몸짓을 지니고 빠르게 움직이는 벌새의 특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초록 눈시울 가득한 나무에서/ 수천만 번 더 날개를 떨어” 달라고 화자는 벌새에게 갈구한다. “나무 위에서 네가 우는 동안”, “나무 아래서” 나는 “악보를 받아 적”었고 “내 심장은 울음 별 하나를 키우고 말았”다고 그는 고백한다. “어제는 너를 그리다 길을 잃었고/ 오늘은 너를 찾다 길에 쓰러졌”다는 말은 사랑의 고백인 셈이다. 그것을 시의 화자는 “말하자면 살아 있다는 거”라고 표현한다.
“순간 순간 절정”인 벌새를 향한 화자의 고백은 사랑의 말이자 살아 있음의 고백이다. 문정희 시인에게 사랑은 살아 있음 그 자체이다. 시인을 살아 있게 하고 시인의 언어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사랑인데 그것은 “미완성이어서 더 절박하고/ 주소가 없어 더 애절한” 것이기도 하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고 생명이 꿈틀대는 사랑의 힘은 이 지독한 종말의 시대에도 시인을 살아 가게 하는데 그 원천은 자연으로부터 온다.
4.
“돈으로 쓰레기를 사고 돈으로 버리는/ 최신 풀 하우스”에서 “주로 카드로 지불하므로/ 낭비의 자책도 없이/ 습관처럼 욕망을 사들이며/활력을 살고 있다는 착각을 소유하는”, “이 도시의” 일상, 그 “고단한 톱니 속에/ 나의 사랑은 사소한 일상으로 조각나고/ 우리 집은 산과 강처럼/ 오염되고 말았다”(「나 버리기」)고 문정희의 시가 고백할 때 이 일상에서 자유로운 독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문정희의 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여자들은 대담하게 얼굴에 칼을 대고/ 남자들은 거세 공포증에 시달리다/ 결국 아이 울음소리 잘 들리지 않는/ 자궁 드러낸 소울”임을 고백한다. “속도와 경쟁 어지러워 주차장이 된 도시”이자 “불안과 조급이 물결치”는 도시로 서울에 대해 비판적으로 그리지만 그럼에도 “즐거운 지옥”이자 “지하철역마다 호객하듯 시가 걸린/ 친절하고 요란한 서울”(「그리운 올가미」, 『그 끝은 몰라도 돼』)이 ‘그리운 올가미’와 같다고 말한다. 도시 문명의 욕망과 경쟁과 속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그럼에도 서울은 시인이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애증의 도시인 것이겠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도시이자 인류 문명이지만 살아 있는 그날까지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이 ‘즐거운 지옥’을 조금은 살 만한 지옥으로 바꿔 가는 것밖에 다른 선택지는 우리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기후 위기 시대에 시가 낼 수 있는 목소리는 결국 살아 있다고 절규하는 생명의 목소리일 것이다. 문정희 시가 평생을 바쳐온 사랑의 시도 미친 경쟁과 속도에서 생명을 건져 올리는 노래일 것이다. “물결에다 시를” 쓰는 “가문도 족보도 없이 떠도는/ 시인”(「시인의 장례식」,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을 그가 아직 꿈꾼다면 말이다.
신생 …………………